역사의식과 글이 가지는 힘
로맨스 소설 사이트인 로망띠끄에 이지아 작가님께서 작성하셨던 글.
로망에서만큼은 안녕하시냐는 인사가 참으로 무색해져버린 성탄절(제가 사는 시간 기준으로) 아침입니다. 이미 아시는 것처럼 저는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 각 주마다 학제가 다르고 각 학교마다 커리큘럼이 다릅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지역 공립학교의 경우 2학기제이며 각각의 학기는 6주씩 3개의 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나비나 꽃과 같은 모양을 한 모빌을 만들어 예쁘게 색칠을 합니다. 그리고 모빌 뒷면에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수많은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넣습니다.
수업시간에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아이들은 때때로 불안한 시선으로 교실 천장에 매달린 자신의 모빌을 바라봅니다. 모빌 뒷면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하지 않았을까 내내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아우슈비츠 안에서 사망한 날짜와 함께 말입니다. 그때 거의 모든 아이들이 제일먼저 하는 일이 사망당시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80세 노인도 있고, 20대 청년도 있고, 채 돌을 넘기지 못한 갓난아기도 있습니다. 모두가 나치의 손에 희생당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처럼, 삼촌을 잃은 것처럼, 어린동생이 죽은 것처럼 서러운 울음을 터트립니다. 가끔 아주 가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20명 남짓한 아이들은 마치 제 일처럼 손뼉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합니다.
그저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소설책 4권을 읽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6주가 지나는 동안 나치가 왜 나쁜지, 히틀러가 왜 개**인지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으로 대표되는 글이 가지는 힘입니다.
글은 그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자에게 제대로 된 역사관과 사회관 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부모를 따라 우리 땅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 소녀 요코가 패전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며 겪는 이야기가 그 내용입니다. 이 책을 쓴 요코 가와시마 윗킨스의 말로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합니다. 즉 실화를 바탕으로 두었다는 뜻이지요. <요코이야기>에 등장하는 조선인은 어린 일본인 소녀를 강간하고 본국으로 도망치는 힘없는 일본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코이야기> 그 어디에도 일본이 1910년 대한제국 국권피탈 이후 36년 동안이나 우리 땅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 줄,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1945년 광복 당시 성난 조선 군중이 본국으로 도망가는 일본인을 때리고 강간한 것이 요코 가와시마 윗킨스가 주장하는 사실이라면, 일본이 731부대를 통해 마루타 생체실험를 자행한 것과 수많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위안부로 만든 것과 이 땅의 젊은 청년들을 강제 징용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사실뿐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고 통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우리 한국인뿐 아니라 가해자인 일본인 역시 진실을 직시하고 통찰할 의무와 책임을 마땅히 가져야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짓은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미국아이들은 조선인은 나쁜 사람이고 일본인은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과 사실을 구분할 줄 아는 시각을 기르고, 사실 저 너머에 숨겨진 진실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십시오. 또한 로망에서 글을 읽는 독자님들께 정중히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로맨스소설은 그저 여자랑 남자가 만나 알콩달콩 사랑만 하면 된다는 시각에서 부디 벗어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맨스소설의 정통코드와는 맞지 않을지언정 제대로 된 역사관과 사회관을 갖추고 글을 쓰는 작가를 보면 칭찬도 해주시고 격려도 해주십시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그릇된 역사관과 사회관에서 비롯된 글이라면 충고도 해주시고 지적도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과 따끔한 관심이 우리가 아끼고 사랑하는 로맨스소설이 올곧게 자라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시끄러운 게시판에 소란을 더하고자 쓴 글이 아님을 제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제 글로 인해 단운설 님의 <왜정애사>와 관련한 역사의식 토론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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