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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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부엌인 이곳은 침침하고 환기도 안 된다. 늘 연탄가스와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다. 매캐하고 짜고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냄새가 밖에서 갓 들어서면 눈이 실 만큼 독했다. 이 냄새는 방에도 옷에도 이부자리에도 배어 있었다. 내 몸에서도 이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냄새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오빠가 이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냄새를 맡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만 남겨 놓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못난 부모 동기에게 복수하는 뜻에서도 이 냄새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치를 떨며 경멸했던가. 배알도 없는 것들이 천덕스럽고 극성스럽기만 하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을 꾀어서 같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흡사 찌개 속의 멸치처럼 눈을 동자 없이 하얗게 뒤집어 깐 추한 주검과, 냄새나는 가난을 나에게 떠맡기고.


그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거부한 가난을 내가 지금 얼마나 친근하게 동반하고 있나에 나는 뭉클하니 뜨거운 쾌감을 느꼈다.」







「"너 그렇게 먹고도 목 메지 않니? 어디서 차나 한잔 사 줄까?"」



「그렇지만 차츰 나는 이 얼간이가 마음에 들었고,

풀빵집에서 못 만나고 마는 날은 하루를 헛산 것같이 허수했다.」







"같이 살면 연탄 반장을 아낄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생활비를 절약하자는 것은 사실 핑계였고

여자가 남자와 함께 살고싶었던 진짜 이유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



그렇게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고

여자는 남자와 함께 살며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행복감을 느낌.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리 늦어도 시장에 들르는 게

내가 상훈이하고 함께 살게 된 후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생선 가게 앞에서 나는 대구와 도미를 구경했다.」



그리고 언젠가 남자가 자신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고 기다리기 시작함.



「저하고 나하고 같이 살게 된 후 절약되는 돈 액수를 또 한 번 조목조목 따져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따질 때마다 신바람이 났다.

먼저, 절약되는 액수 중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방세 4천원,

그러고 나서 연탄값, 반찬값, 양념값 등 덜 드는 걸 시시콜콜 따지자면 한이 없었다.

그렇지만 두 가구가 한 가구가 됨으로써 이익을 보는

수도세,전기세,오물세까지 따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일부러 빼먹었다.

서로 좋아한다는 것, 실상은 이게 둘이 같이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텐데,

나는 그 말을 번번이 빼먹었다.

그 말에 부끄럼을 타기도 했지만,

그 말만은 상훈이가 나에게 하게 하고 싶었다.」






여자는 동료들끼리 돈을 모아 문병이라도 다녀오라고 일러주며

일부 꺼내 쓰라고 공동의 예금통장을 건네줌.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만큼의 처지가 된 스스로에게 묘한 뿌듯함을 느끼면서.

「얼마간이라도 걷히는 대로 빨리 갖다 주라고 신신당부하고
공장에 나와서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로 온종일 마음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도 남아 남을 돕는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러웠다.」


「“뭐라고. 모두 가난뱅이들뿐이라고? 그럼 우린 뭐니? 우린 부자니, 응? 우린 부자야?”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그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다가 골통을 벽에다 콩콩 부딪혀 주었다.

그래도 그는 태평스레 히죽히죽 웃었다.

그는 3만여 원 중 반이 넘는 돈이 자기 돈인데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폐병쟁이를 뼈아프게 동정했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안다.

둘 다 그에겐 조금도 절실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도와주고 싶은데 돈은 아깝고, 그래서 돈을 꺼냈다 넣었다.

2천 원을 내놓을까. 3천 원을 내놓을까, 천 원 상관으로 10분도 넘게 괴로워하고 도와줄까 말까로

한 시간도 넘어 애타심과 이기심이 투쟁하는 그 뼈아픈 갈등을 전혀 겪지 않고,

헌신짝 버리듯 무심히 3만여 원을 그냥 버렸던 것이다.

그걸 깨닫자 나는 오한처럼 오싹 기분 나쁜 불안감을 느꼈다. 



“넌 뭐니, 넌 뭐야? 이 새끼야. 넌 부자니, 부자야?”」





하지만 남자는 계속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이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에 돌연 이질감을 느낌.


「너의 그건 가난뱅이들의 억척스럽고 모진 그 청청함하곤 확실히 다르다.
전연 이질적인 것이다.
나는 깊이 전율했다.」


「밥벌이를 위해서도 공장에는 나가야 했지만 공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가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꼭 돌아와 있을 것만 같은 확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방에 불이 켜져 있을 것을 믿으며, 산동네의 비탈길을 미친 듯이 달음질치는 뜨겁고 부푼 기대의 시간을 위해서 공장에 나가는 거였다. 나는 기적이란 사람 눈에 안 띄게 몰래 일어나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 방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도 매일 방을 비워 줘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허탕을 치면서도 매일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정말 기적처럼 방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목격함.




부푼 맘에 문을 열자 방에 앉아있던 사람은
마치 부자집 도련님처럼 좋은 옷을 입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깨끗한 모습을 한, 전혀 다른 행색의 남자였음.

「나는 그가 비참하게 돼서 돌아오는 경우만 상상했지
이렇게 훌륭하게 돼서 돌아오는 경우를 전혀 예기치 못했으므로 우두망찰했다.」

남자는 친절하지만 어딘가 사무적인 태도로
"돈 갚을려고, 그때 그게 3만 얼마더라?"라고 여자에게 물어옴.

「나는 내 속에서 꿈틀대던 정다운 것들이 영영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지독한 혼란이 왔다.」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느끼며 좌절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음.




“여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도둑놈은 더구나 아냐.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분이실 뿐이야. 아들자식이 너무 고생 모르고 자라는 걸 걱정하셔서 방학 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듣겠어?”

“우리 아버진 좋은 분이야. 요즈음 세상에 보기 드문 분이지. 자식들에게 호강 대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으셨던 거야. 덕택에 나는 이번 방학에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어.”

“아버진 만족하고 계셔, 내가 그동안 그 지독한 생활을 잘 견딘걸. 그래서 친구 분한테도 자식들을 그렇게 고되게 키우는 걸 권하실 모양이야. 실상 요새 사람들, 자식을 너무 연하게 키우거든.”


알고보니 남자는 부잣집 대학생 아들이었는데
아들이 고생 모르고 자라는 것을 걱정한 아버지가
아들을 일부러 빈민가에 위장전입을 시켜 한동안 공장에 다니게 했던 거였음.ㅎ

남자는 자신의 사연을 늘어놓으며
이제 부자들 사회에선 가난 장난이 유행할 거라는 말도 들려줌.
그리고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상상함.
기름진 영감들이 둘러 앉아 자식들을 미국이 아닌 빈민굴로 유학을 보내는 유행에 대해서.

여자가 정말 연탄값을 절약하기 위해 자기와 살았다 생각한 등신같은 남자는
여자에게 인심쓰듯 자기집 식모 자리까지 제안함.
이런 생활은 '부끄러워'해야 하고
'끔찍하므로' 청산해야 한다고. (fuck you)

“그래서 아버지가 기분 좋아하시는 낌새를 타 가지고 네 얘기를 했어. 이런저런 빈민굴의 비참한 실정을 말씀드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슬쩍 내비쳤지. 글쎄 하룻밤에 연탄 반 장을 아끼자고 체온을 나누기 위한 남자를 한 이불 속에 끌어들이는 여자애가 다 있더라고 말이야. 물론 끌려들어간 남자가 나였단 소리는 빼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집에 데려다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다가 쓸 만하면 어디 야학이라도 보내자고 하시잖아.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해. 이건 끔찍할뿐더러 부끄러운 생활이야. 연탄을 아끼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이는 생활을 너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돼.”

암, 부끄럽고말고.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당장 이 몸이 수증기처럼 사라질 수 있으면 사라지고 싶게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모와 가족이 가난을 못견뎌 자신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때
여자는 가난을 곁에 두며 가난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텨냈음.
어머니가 경멸하던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특이한 발랄함'을
자신은 친근하게 여기며 동반하고 살아낸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던 여자였음.
여자는 그런 '가난'을 남자에게 송두리째 희롱당했다고 여김.


「도대체 가난을 뭘로 알고 저희들이 희롱하려고 해.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결국 여자는 온갖 욕설 퍼부으며 남자를 집에서 내쫓음
남자는 "미쳤구나"라고 중얼거리며 여자에게서 혼비백산 도망치고
그 모습에 여자는 또 한번 낙담함.


「그는 구두짝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도망치면서 중얼거렸지만
아마 곧 나에 대해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폐병쟁이를 잊어버리듯이 쉬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여자는 삶에서 남자를 단호하게 뿌리쳤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가지만,
그 방이 더이상 어제와 같지 않다고 느끼며 완전한 절망에 빠짐.
자신에게 유일했던 '가난'마저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그를 쫓아 보내고 내가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는지 스스로 뽐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방은 좀 전까지의 내 방이 아니었다. 빗발로 얼룩얼룩 얼룩진 채 한쪽이 축 처진 반자,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나 더러운 벽지, 지퍼가 고장 난 비닐 트렁크, 절뚝발이 날림 호마이카 상,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와 서로 결박을 짓고 있는 낡은 트랜지스터라디오. 우그러진 양은 냄비와 양은식기들, 이런 것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무의미하고 추했다. 어제의 그것들은 일사불란하게 나의 가난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분해되어 추한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판잣집이 헐리고 나면 판잣집을 구성했던 나무 판때기, 슬레이트, 진흙덩이, 시멘트 벽돌, 문짝 들이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가 되듯 내 가난을 구성했던 내 살림살이들이 무의미하고 더러운 잡동사니가 되어 거기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 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작가의 1975년작 '도둑맞은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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